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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드라마 ‘빅뱅이론’의 등장인물들이 TRPG 게임 ‘던전 앤 드래곤’을 즐기고 있다. 

▲ TRPG 게임 ‘마법의 가을’은 펀딩 달성률 약 1,500%를 달성했다. [출처 | 화면 캡처]



누구든지 어렸을 적 한 번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의 주인공과 같은 환상 세계 속에서 멋진 모험을 펼쳐나가는 꿈을 꿔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여기, 손쉽게 그런 모험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준비물도 아주 간단하다. 펜과 종이, 주사위, 그리고 몇 명의 친구들. 장대한 모험의 시작을 떠날 준비는 이것으로 전부 끝났다. 어떻게 하는 걸까? 바로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Tabletop Role Playing Game, 이하 TRPG)을 통해서다.


| 주사위로 플레이하는 아날로그식 RPG

| ‘역할놀이’를 하는 보드게임이라고?


우리가 흔히 아는 <리니지>, <메이플 스토리>, <로스트아크>, <던전 앤 파이터>,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등의 게임은 RPG게임이라고 분류된다. RPG게임이란 플레이어가 게임 세계관 속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고 성장시켜, 캐릭터가 세계관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도록 조작해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게임을 이른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RPG게임은 보통 컴퓨터나 모바일 환경에서 즐기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컴퓨터가 없던 시절, 종이와 펜과 주사위만을 사용해 RPG를 보드게임으로 즐기던 문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TRPG다. 더 정확히는 오늘날의 RPG 게임은 컴퓨터의 발전에 따라 TRPG를 컴퓨터 환경에서 구현하며 만들어졌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TRPG란 정확히 무엇일까? TRPG는 흔히 테이블에 앉아서 사람들과 모여(Tabletop) 각자 분담된 역할을 연기하는(Role-playing) 주사위 게임이라고 정의된다. 쉽게 설명하면 보드게임을 플레이할 때 일종의 ‘역할 놀이’를 함께 가미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게임 안에서 움직일 자신의 캐릭터를 각자 만들고, 그 캐릭터에 이입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여기까지는 TRPG가 컴퓨터·모바일 RPG와 크게 다르지 않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TRPG에는 게임을 진행하는 인공지능이 없으므로, 참여자 중 한 사람이 진행자 역을 맡아 게임 속 세계를 묘사하고 전투를 진행하며, 게임의 모든 것을 관장하게 된다는 점이 사뭇 다르다. 진행자가 게임 속 세계를 묘사하면 플레이어는 그 묘사에 따라 자신의 캐릭터가 어떻게 행동할지 설명하고, 필요에 따라 주사위를 굴려 행위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가 흔히 아는 ‘마피아 게임’ 또한 아주 단순한 형태의 TRPG라고 할 수 있다.


| 중세에서 시작된 TRPG의 역사

| 북미에서 국내까지


국내에서는 TRPG라는 문화 자체의 인지도가 낮지만, 시장의 규모가 큰 북미 등에서는 유래가 깊고 널리 알려진 문화 중 하나다. 최초의 TRPG는 유럽 전근대 귀족들이 즐기던 ‘워 게임’의 재현으로서 나타났다. 워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사령관이 돼 격자맵 위에 부대를 놓고 전쟁을 시뮬레이션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TRPG는 플레이어가 여러 부대를 조종하는 대신 전사나 마법사, 성직자, 도둑과도 같은 한 캐릭터만 조종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최초의 TRPG 게임인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는 이렇게 개발돼, 게임을 좋아하는 ‘너드(nerd)’ 문화를 타고 빠르게 번져나갔다. 너드 문화를 다룬 미국 드라마 ‘빅뱅이론’의 등장인물들 역시 모여서 ‘던전 앤 드래곤’을 플레이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국내에 TRPG라는 문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90년대 무렵,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TRPG를 배워 온 세대가 귀국하면서다. 해당 세대가 PC통신을 통해 인터넷으로 같이 TRPG를 플레이할 사람을 모집하고, 사람이 모여들면서 점차 TRPG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초기 멤버들이 이러한 취미에 큰 영향을 받았던 걸까. 대부분은 추후 RPG 게임 회사에 입사해 게임 개발자로서의 활동을 이어 나가게 된다. 그러나 TRPG 게임의 번역과 수입을 담당하던 회사들이 점차 사업을 접으며 시장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TRPG가 다시 생명력을 얻은 것은 2010년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서다. 적은 초기자본금을 가지고 번역 수입을 시도할 수 있게 되며, 점차 여러 TRPG 게임들이 정식 발매되기 시작했다. 관련 출판사들의 크라우드펀딩 매출은 매 차례 늘기 시작했고, TRPG를 다루는 소규모 인디 출판사 수 역시 급격히 늘어났다. 유튜브 등의 매체를 타고 TRPG의 미디어믹스화 또한 진행됐다. 웹툰 작가 이말년은 ‘침착맨’이라는 방송인 닉네임을 통해 ‘호미니아 탐험대’라는 TRPG 라이브 방송을 진행해 큰 호응을 얻었다. TRPG 전문 팟캐스트 채널 ‘탁상예능’, TRPG 플레이 영상을 올리는 유튜버 ‘블루밍하우스’ 역시 인기를 끌고 있다.


| 함께 만들어 나가는 공동 서사 창작

| 치유와 성장의 이야기


‘빅뱅이론’의 등장인물 ‘셸든 쿠퍼’는 TRPG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그래픽 칩을 사용해. 바로 ‘상상력’이지.” 정해진 화면 속에서 정해진 행동만을 할 수 있는 컴퓨터 게임과 다르게 대화를 통해 이끌어나가는 TRPG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가 부여된다. 학창 시절부터 TRPG를 즐겨 플레이했다는 황혜주(22) 씨는 “공동 서사 창작이야말로 TRPG의 핵심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보드게임이나 컴퓨터 게임과 달리, TRPG는 플레이어와 진행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다 같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황 씨는 “게임을 마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따라 할 수 없는 온전한 우리만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같은 게임을 여러 번 플레이해도 캐릭터가 다르고 함께 플레이하는 사람이 다르면 매번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며 TRPG의 매력에 대해 설명했다. 


이러한 공동 서사 창작은 단순한 창작 경험을 넘어서, 때로는 자기 치유와 성장의 기회로도 작용한다. TRPG 플레이어인 김유정(23) 씨 역시 “캐릭터를 만들고 움직이다 보면 나조차 몰랐던 내 안의 욕망이나 상처와도 자연스럽게 마주보게 된다”며 TRPG를 통해 내면의 성장을 경험할 수 있음을 전했다. 북미에서는 교육용으로 TRPG가 사용된 사례도 여럿 보고된다. 교실 안에서 게임이라는 즐거운 수단을 통해, 아이들이 기본적인 논리와 사고력은 물론 타인과 소통하는 법, 규칙을 따르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씨는 “TRPG는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는 만큼, 대화와 조율이 몹시 중요한 취미생활”이라며 “소통을 통해 인간관계를 꾸려나가는 법을 많이 배웠다. 여러모로 취미생활로 소중한 경험을 한 셈”이라 전했다.



김현주 기자 hj210031@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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