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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8년 전의 일이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흥분으로 전 세계가 들썩거릴 무렵,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를 지난 천 년의 세계 역사를 통해 가장 빼어난 정치 지도자로 선정했다. 붕괴 직전의 나라를 구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머니 앤 불린이 대역죄로 처형당하고 자신은 졸지에 사생아 신세가 되었을 때, 그녀 나이 겨우 세 살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더구나 이복언니인 메리가 왕위에 올라 가톨릭 복원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으면서 신교도인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 갇히게 되었고, 언니 앞에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메리 여왕이 죽은 후 스물여섯 살의 엘리자베스가 그야말로 기적처럼 왕위에 올렸다. 가장 열성적인 지지를 보낸 사람들은 청교도들이었다. 특히 메리 치하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건너가 칼뱅 밑에서 교리를 익힌 젊고 패기 있는 젊고 패기 있는 젊은 성직자들이 원한 것은 진정한 신교적 교리에 기반을 둔 영국 교회의 건설이었으며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종교문제 해결을 국정의 우선과제로 삼았던 엘리자베스가 1559년 내놓은 종교 통일법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었다.
그녀의 해법은 이른 바 중도(via media) 정책으로서 가톨릭과 신교의 교리를 광범위하게 절충하고 양측의 극단적 주장을 배제한 것이 그 특징이었다. 이는 가장 열성적인 지지 세력이었던 청교도들의 염원을 외면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던 그들에 의존해서는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어찌 보면 그녀가 선택한 중도정치 또는 ‘중간의 정치’는 상당 부분 그녀의 창안이었다. 이것은 윤리적 타당성을 가지는 중용의 개념과는 달리 단순하게 양 극단의 가운데 공간을 정책 범위로 설정한 것으로서 선례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녀의 중도정치가 종교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영국으로 하여금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1562~1598),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 등, 유럽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극심한 인적, 물적 손실을 피해가게 함으로써 유럽의 중급국가이던 영국을 장차 대영제국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 받는다. 이후 영국에서 이 ‘중간의 정치’는 합의의 정치를 쉽게 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20세기 영국에서 중간의 정치의 사례를 보여주는 것은 버츠컬리즘(Butskellism)이다. 1950년대 초 《이코노미스트》지가 당시 집권당이던 보수당의 재무장관 버틀러(R. M. Butler)와 노동당의 예비내각의 상대방인 게이츠컬(H. T. N. Gaitskell)의 이름을 합성하여 보수, 노동 양당 사이의 정책적 합의 기조를 일컫던 말이었다. 이들은 어느 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사회복지를 확대하고,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며 중간계급의 복지 수혜계층 편입을 추구할 것을 합의했다. 결과가 복지국가 영국의 건설이었다.
그런가 하면,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이 주도한 ‘제3의 길’은 중간의 정치가 특정 정치세력의 집권과 관련해서도 그 유용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전후의 경제성장으로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계급투표 성향을 나타내는 알포드 지표는 1960년대 중반까지는 45 수준을 유지했지만 80년대 초반에 20까지 떨어졌다. 보수당의 장기집권이 이루어지는 위기상황에서 그들이 집권 전략으로 내세운 신노동(New Labour) 정책의 핵심은 노동당 당헌 제4조(생산수단의 공유)의 폐지, 노동조합과의 연대 축소, 시장경제 원리의 존중, 그리고 기업가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의 보장이었다. 이들의 과감한 우클릭 정책은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의 압승으로 보상받았다. 18년에 걸친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종식시키고 노동당 정권을 출범시킨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중간의 정치가 가지는 정치적 유용성, 특히 양당 제도를 가진 국가에서 그것이 가지는 유용성은 흔히 ‘호텔링의 법칙(Hotelling’s Law)‘에 의해 설명된다. 남북으로 쭉 뻗은 도로를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이 있다고 하자. 만약 2개의 편의점이 그 마을에 들어선다고 할 때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위치는 어디일까? 또는 바닷가 백사장에 2대의 아이스크림 카트가 있다고 하자. 이들이 최고의 이익을 올릴 수 있는 이상적인 위치는 어디일까? 두 질문의 정답은 ’중간‘이다. 양당정치에서 중간을 선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해주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정치는 합의의 정치라는 정치적 전통에 더해 중간의 정치를 중요시하는 전통이 작용함으로써 정치적 안정과 발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3차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를 두고 여야 간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하기야 그다지 크지도 않은 정책적 차이를 가지고도 사생결단의 대결을 벌이는 우리 정치이고 보니 그다지 낯선 풍경은 아니다. 그들도 잠시 정쟁을 멈추고 중간의 정치가 가지는 유용성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 허구생
  •  승인 2018.10.02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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