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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편적 치유를 말하기의 어려움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조건의 삶에 구속되고 다른 내면의 결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기에, 치유가 무엇인지를 내용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다만 치유란 결국 이야기이며 이야기는 표현이라 말하고 싶지만, 실은 이야기와 표현이라는 당위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할 때가 있으며 치유라는 화두 자체가 큰 장애물일 수도 있으니, 결국 치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주장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10년 전부터 <치유서사창작>이라는 주제로 수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자신이 기억하거나 상상하는 치유적 자원을 이야기로 불러들이고 때로는 트라우마를 ‘작업’하기도 하면서, 이야기하는 시간과 과정 자체를 또 하나의 새로운 치유적 자원으로 경험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이 내용을 학술적으로 제시할 수는 있지만, 사실 ‘치유’와 ‘창작’의 핵심은 추상과 개념 너머로 나아가려는 어떤 지향성이다. 언어와 분석, 과거보다는 신체와 감정, 표현과 공감, 현재와 직접성을 중시하기에 치유하는 창작은 정제되고 정체화한 지식을 생경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설령 학술을 통해 그 문에 들어서더라도 마침내 실현된 상태에서는 ‘학술’ 바깥의 상태인 것이 치유하는 창작의 경험이다.
그렇기에 치유하는 창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가장 생생하고 흡족하게 여기는 것은, 홀로 고투하면서 쓴 글을 여럿 가운데서 낭독하고 서로 귀 기울이는 시간이다. 낭독자는 보편적인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자신이기 위해 글을 읽고, 청자는 타인의 사정에 제 마음을 얹고 열리는 확장을 통해 조금 자유로워진다. 다른 삶, 다른 이야기의 존재가 확장과 자유로움을 가져다준다. 이쯤에서 치유의 조건을 지식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지식은 하나를 알고 다른 무언가를 망각하는 지식일 뿐이다.
아마도 치유하는 창작이란 지식(수집과 축적)이 아니라 그것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내 마음을 어떤 방향을 향해 열고 맡기는 방식으로만 합당히 만날 수 있는 대상이 아닌가 한다.

2. 치유서사론의 기반과 인접영역

인류의 심리적 본능 가운데 하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 그 가운데서도 손상된 삶이 어떻게 복구되는가를 그리는 과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겨 왔다. 서사학자들이 이야기란 손상된 질서가 균형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이는 삶의 치유에 관한 말이기도 했다. 저와 같은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먼 과거부터도 그러했기에, 인류문화라는 저장고는 ‘더 나아진 삶’을 향해 옮겨가는 숱한 기릴 만한 이야기들로 넘쳐나고 빛난다.
인류문화라니, 이는 너무 큰 개념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이야기 일반에 대한 우리의 상식 또는 서사론(구조주의/기호학)을 온갖 지식들이 횡행하는 중심의 질서로 삼을 수 있고, 치유서사의 연구자나 수행자는 자신의 관심분야를 끌어들여 잠재적으로 누구하고든 소통 가능한 형태로 작업할 수 있다.
내가 문학 외에 관심을 두어온 분야는 예술치료, 정신분석과 상담 그리고 종교였다. 모두 역력하게 치유에 관한 담론을 갖고 있기에 그랬으리라. 그러나 이들 각각은 넓은 지식영역이면서도 멀리서 보면 협소한 관심사에 지나지 않기에, 사람은(나는) 늘 다른 치유의 앎과 이야기를 원하게 된다.
치유란 무엇인가? 인류문화는 많은 사례와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지만, 그 숱한 앎들과 개인들 사이엔 언제나 새롭게, 비로소 연결되어야 할 간격이 있다. 치유서사론이란 아마도 그 간격을 이해하고 해소하는 방법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보편적 치유가 무엇인지는 여간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누군가 보편적 가치로 내세우는 것에 대해 그것이 억압으로 작용하는 이치와 실례를 대기가 쉽다. 생명과 사랑과 평화라는 아름다운 말조차 개념이 아닌 현실에선 강박과 위선을 통해 문득 심연을 거느리곤 한다.
그러나 치유를 추구하는 방법에 관해서라면 하나의 질서를 따를 수 있다. 그것은 말하고 듣기이다. 들숨과 날숨처럼 짝을 이루는 인간의 근본소여들이 있다. 20세기 구조주의 인류학이 알려준 바 있는 교환(주다/받다)의 원리 역시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대칭성 위에 치유서사론은 기초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를 각성하여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짓고 말하고 듣는 평범한 일은 상상 외로 심원한 삶의 과정에 접촉하여 치유의 형식과 자원을 얻는 일로 경험된다는 것이 치유서사론의 인식이다.


3. 치유하는 창작의 시작
치유의 감각이란 어떤 것일까? 예를 들면 자전거를 배울 때 혼자 힘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최초의 순간처럼 주체의 감각 속에 내가 자유롭고 선명해지는 느낌일까? 사람들이 숙고 끝에 얻어낸 구원과 해탈, 혹은 치료의 종결이나 자기긍정과 같은 말들은 커다랗고 편리한 개념이지만, 그 개념의 넓이와 정태(靜態)가 개별적 행로와 경험의 변증법을 억압한다.
치유하는 이야기 창작에 관심 가진 이들이 모인 곳에서 나는 카를 융의 경험과 그의 문장을 들려준다.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그만큼, 다시 말해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그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다양한 예술치료의 바탕이 되는 이 문장은 또다시 복잡한 지식이 되고 싶어 하지만, 치유하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누기 위해서는 그런 지식이 필요치 않다. 지금 여기의 나에서 출발하여 쓰고 움직이며 소리 내고, 그러는 자신의 행위를 믿고 나아가면 된다. 그런 ‘나’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


  • 승인 2018.09.18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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