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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데카르트가 자연과 사회를 철저히 지배, 조작하고자 하는 근대적 세계관을 창시했다고 평가한다. 여기에는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처럼 되어야 한다.”라는 데카르트 <방법서설>의 표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데카르트야 말로 동물을 기계로 환원함으로써 동물을 착취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던가? “주인과 소유자”라는 표현 외에 데카르트의 다른 저작, <정신지도규칙>에서는 “보편수리학mathesis universalis”이라는 표현이 발견된다. 하이데거는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라는 표현과 “보편수리학”이라는 표현을 연결함으로써 데카르트가 자연에 대한 기술적 지배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고 평가한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평가는 그를 반대하는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역시 계승된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기에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인다. 자연에 대한 제어되지 않은 지배의 가능성은 19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혐의가 적절치 않다는 것은 하이데거의 ‘보편수리학’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하이데거는 보편수리학이 자연의 기술적 제어를 목적으로 한다는 생각했다. 필자는 그와 반대로 보편수리학이 인간 정신의 기술적 제어를 목적으로 한다고 본다. 중요한 점은 정신의 기술적 제어가 정신을 착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의 능력을 함양하고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데카르트의 보편수리학은 스토아 철학에서 가르치는 정신 훈련의 이상의 연장선 위에 있다. 스토아 실천철학은 어떤 문제 상황에 부딪치면 먼저 “내게 달려 있는 것”과 “내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구분하도록 가르친다. 이러한 구분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잠정적 도덕의 세 번째 준칙과 그의 <정념론>에서 그대로 발견된다. 이 구분을 통해서 문제 상황은 내게 달려 있는 것들, 즉 정신활동들의 관점에서 정식화된다. 다시 말해, 문제는 정신의 내면적 성장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식화되는 것이다. 보편수리학은 이러한 기능을 수학 안에서 수행한다.

<정신지도규칙>에서 데카르트는 수학의 다양한 분과들이 수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순서와 척도ordre et mesure”와 관련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수학의 다양한 분과들을 넘어 오직 이러한 “순서와 척도”만을 연구하는 수학의 분과가 있는 바, 그것이 바로 보편수리학이라고 말한다. 최근에 다비드 라부앙이라는 수학사가는 “순서와 척도”가 르네상스 수학에서 크기들의 사이의 다양한 “비례관계”를 분류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명칭들임을 훌륭히 보여주었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비례관계” 이론이 르네상스 수학 안에서 정신의 문제해결능력을 체계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도구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비례관계”가 갖는 이중성 때문에 가능했다. 즉 비례관계는 도형, 또는 수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계들을 “비교”하는 정신의 작용 역시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학적 문제를 비례관계의 관점에서 정식화한다는 것은 그 문제를 정신에 내면화하는 것과 같다.

<정신지도규칙>에서 데카르트는 이러한 문제의 내면화의 이득을 예를 통해서 보여준다. 이 예는 “너무나 명백해서 유치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에 따르면 수학의 내용 전체를 요약한다. 먼저 그는 곱셈을 통해서 3, 6, 12, 24, 48의 “계열”을 구성한다. 다음으로 그는 이 계열과 관련해 여러 문제들을 제기해보고, 그 문제들 사이에 ‘난이도’의 차이가 있음을 관찰한다. 우리는 3과 6이 이미 주어진 상태에서, 6에 뒤따르는 수, 즉 12를 물을 수 있다(6×2=x). 이 경우 데카르트에 따르면 문제는 “극히 쉽다.” 반면 3과 12만을 주고, 그 둘의 중간항을 찾을 수도 있다(3/x=x/12). 이 경우 문제는 이전보다 한 “등급” 더 어렵다. 마찬가지로, 3과 24를 주고 그 사이에 있는 두 개의 중간항을 찾는다면(3/x=x/y=y/24), 문제는 다시 한 “등급” 더 어려워진다. 언뜻 보기에, 3과 48을 준 상태에서 그 사이의 세 중간항들을 찾으라고 한다면(3/x=x/y=y/z=z/48) 문제는 바로 전 문제보다 한 ‘등급’ 더 어려워져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먼저 3과 48 사이의 중간항(3/y=y/48), 즉 12를 구하고, 그 다음에 12와 3, 12와 48 사이의 중간항을 차례대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식으로 넷째 문제의 난이도는 둘째의 문제의 난이도와 같게 된다. 문제를 이와 같이 비례관계를 통해 정식화하는 것은 문제가 갖는 정신적 구조를 파악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비례관계라는 것은 크기 사이의 관계들을 비교하는 정신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요점은 이렇게 한 문제의 정신적 구조를 파악하면 정신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그 문제를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정신은 자신의 문제해결능력을 한 단계 고양시킨다.

비례관계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보편수리학은 스토아적 정신 훈련의 이상을 수학 안에 도입한다. 다시 말해, 스토아적 훈련이 역경을 자신의 도덕적 함양의 기회로 삼는 영혼의 능력을 함양한다면, 보편수리학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용해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정신의 능력의 함양한다. 보편수리학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하이데거의 보편수리학에 대한 이해와 멀리 떨어져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해석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과잉된 기술주의적 해석 역시 반박한다. 이러한 점에서 데카르트가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처럼 되어야 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처럼comme”이라는 표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처럼”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항상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할 때도, 어떤 ‘정도’ 또는 ‘한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서강학보
  •  승인 2018.11.14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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