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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가끔 고마우면 주인에게 쥐를 물어다 준다. 나는 이제껏, 배려의 기본은 역지사지라고 생각해 왔었다. 본인을 기준으로, 예의라고 생각하는 선을 지키고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은 자제하는 것이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배려가, 상대에게는 모욕일 수도 있다는 것, 혹은 반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럼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 하고 고민에 빠졌었다.


세상을 내 기준으로 보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이 다양한 사람과 가치관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몸으로 겪어본, 다양성에 면역이 된 자아는 세상을 마주할 때 좀 더 유연하고 편견 없이 대하게 된다랄까. 나는 여행을 다니며 '다양성'에 면역을 키우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라’를 상투적인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여행 며칠에 그 돈을 써? 그 돈이면 아이패드를 사지."라고 말하던 나였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아가 세상이 스며든 자아인지, 거울만 바라보고 산 자아인지는 차이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엔 정말 이상하고, 평범하고, 암울하고, 재밌고, 재미없고, 어색하고, 꺼려지고, 흥미롭고도 다양한 일들과 사람들 있다. 세상은 요지경이니까. 어떤 지경인지 보라! 이 세상엔 특이하고 다양한 볼거리가 많다. 정말로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듣고 보면 나름의 논리가 의외로 맞는 말이었던 신기했던 경험도 있다. 경험하고 여과해서 흡수한다. 사고가 확장되면서 선호, 비선호 그리고 취향, 개성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고집은 있되 아집은 없어지는 듯하다. 개방적인데 줏대 있는 사람, 내가 추구하는 인간상이다.


다양한 모든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다만, 그냥 '그런 게 있구나' 하고 보는 것,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고양이가 물어준 쥐를 보면 기겁하면서도 선물을 주고 싶었던 그 마음이 기특해 고마움을 느끼는,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다. 세상은 고마움에 대한 표현의 다양성조차 다른, 요지경이다. 나도 그 지경이 뭔지 계속 알아가련다.


김서영 (신방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