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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도서관과 집 사이에는 꽤 넓은 도로가 있다. 그래서 집에서 도서관을 갈 때나 도서관에서 귀가할 때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내가 주로 건너는 건널목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건널목이 하나 더 있다. 이쪽 건널목과 저쪽 건널목은 신호가 동시에 바뀌는데, 나는 건널목을 건널 수 있는지를 저쪽 건널목의 신호등으로 종종 확인한다. 인도의 신호등 대신 차도의 노란 등을 확인한다면 기다림이 일초가 줄어드는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 조삼모사의 원숭이처럼 되었지만, 가끔은 손톱만큼 더 좋은 선택지를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저녁 즈음에 도서관에서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건널목에서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늘어질 때면 노란 등 쪽으로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린다. 저쪽의 노란 등과 이쪽 초록 등은 항상 같은 주기를 가져야 한다. 저쪽 신호등의 주기가 3분이면 이쪽도 3분이어야 한다. 3분 10초는커녕 3분 1초여서도 안된다. 그래야 어느 날이나 저쪽은 이쪽과 관계 맺어지고, 나는 노란 등을 사용할 수 있다. 관계가 맺어진다는 말은 특별하지 않다. 이쪽과 저쪽이 행동을 함께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저쪽 신호등의 노란 등이 켜지면 나는 패달에 발을 올린다.


나는 그 다음날 아침에도 신호등을 기다린다. 나는 이 시스템 속에 있다. 이들과 관계 맺었기 때문이다. 무대 위 배우가 기계처럼 움직이듯, 길바닥이 각본과 함께 움직인다. 나는 다시 기다리고, 저쪽 노란불에 눈을 돌리고, 노란불이 켜지면 이쪽 신호등도 긴장한다. 그러면 나처럼 노란불을 바라보던 사람들도 건널목으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초록불이 터지기 직전부터는 다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초록불을 보고 자전거에 올라탈 때 연극이 끝나고 나는 이 시스템 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걸 반복하다 보면 이젠 무대 뒤의 기계장치밖에는 안 보인다. 가끔가다 등장인물이 톱니바퀴 뭉치 갈빗대에 붙은 종잇장처럼 느껴진다는 의미다.


“톱니바퀴가 어딨나, 친구?” “글쎄? 신호등 바로 왼쪽에 서있는 회색 분전반 속에?” 물론 어딘가에는 있을 거다. 회색 분전반같이 누추한 곳은 아니고.


윤영찬 (수학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