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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했다. 살아있는 시체 같았다. 


그래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심장 소리에 집착했었다. 처음엔 위로가 되었으나, 곧 허튼짓임을 깨달았다. 그 소리는 내가 아직 한참 더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내 발걸음의 무게를 몇 배는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나에게 살아있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다른데, 살아있는 것은 힘들지 않다. 내가 죽지 않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힘든 것은 존재하는 것이었다.


공허했다.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나는 사라지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죽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건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저 죽는 것이고, 나의 원함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남긴 모든 흔적이 없어지는 것, 죽음으로써 삶을 마감하지 않고 그냥 애초에 존재하지 않던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면, 넉넉잡아 200년 후엔 내 존재는 잊혀 사라지게 되긴 할 테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내 죽음에 대해 어떤 간접적 경험도 하지 않는 게, ‘내가 사라지는 것’의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로 내 흔적을 모두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흔적을 사랑했고, 나아가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애증이더라도 말이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지만, 나는 또 그 모든 흔적들을 사랑해야만 했다. 잊어버리고 싶은 흔적이었어도 그저 그 자체로 사랑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 근거 없는 의무감 속에서야말로 자유로이 내 흔적을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사랑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을 사랑하는 그 관계를 사랑하는 것도, 이별한다면 그 이별마저 사랑하는 것 모두 그 의무감 속에서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들을 쌓아와야 겨우 존재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 이 생각을 떠올린 것은, 아마 ‘내 것이 아닌’ 내 영혼일 것이다. 그가 나를 위해 한 최후의 발악이었을 것이다. 그 발악은 내가 나의 흔적을 사랑하게끔, 더 나아가 흔적을 남기게끔 만들었다. 자그마한 흔적들을 사랑하고 쌓아가야 결국 존재할 힘이 생기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존재하려는 의지가 담긴 나의 첫 발악이다.


최윤지 (국문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