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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에서 헌팅턴은 이념적 갈등이 끝난 오늘날 세계의 운명은 문명 간 갈등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비록 1990년대의 주장이고 여러 비판을 받는 책이지만, 냉전 이후 문화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새로운 정치적 위기를 빚어낼 것이라는 통찰은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충돌하는 문명이란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런데 종교가 무엇인가? 한국인의 절반 이상은 무종교인데도 종교가 그렇게 중요한가?


종교의 단일한 개념에 대한 합의는 불가능하고, 방법론과 틀에 따라 여러 정의가 가능하다. 다만 종교학자 W.C. 스미스의 안전한 정의를 따르자면, 종교는 축적적 전통과 믿음의 조합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믿음과 이에 따른 실천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종교라고 할 수도 있다. 종교를 경멸했던 계몽주의는 인간의 보편적 합리성을 숭배하는 독단적인 신념 체계였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도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라는 지상명령에 따라 당이라는 이름의 교회들을 개척했고, 만민에게 노동자와 농민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실로 세상에 종교 아닌 것이 없고, 종교 없는 사람이 없다.


적극적 이민정책이 저출산 문제의 해답이라는 주장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동의 여부를 떠나서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우리는 적대와 대화라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게 아닐까. 헌팅턴의 통찰이 유효하다면, 공동체의 운명은 우리가 다른 믿음과 세계관을 가진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다름을 박해할 것인가, 환대할 것인가? 우리 사회는 용광로가 될 것인가, 샐러드 볼이 될 것인가? 나는 이런 문제들에 종교 연구가 유의미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종교 전통은 80억 인류를 결코 하나의 틀로 환원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여러 종교 이론은 그동안 경시되어 온 인간의 종교성(homo religiosus)을 규명하려고 노력한다. 올해 입학하는 새내기들을 포함한 학우들이 종교학 교양 및 전공수업을 통해 자기와 타자를 더 깊이 알아가길 조심스레 제안해 본다.


오세한 (철학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