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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용서를 수도 없이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사랑해야 하고, 그렇기에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는 논리는 신약 성경 전반을 꿰뚫고 있다.


용서는 그 무엇보다 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강한 무기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고 확신한다. 우선 용서하는 사람은 복수심과 미움 등 여러 부정적 감정에서 해방된다. 부정적 감정을 품고 있을 때 소진되는 사람은 본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기에, 용서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용서받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용서받지 못할 행동에 대한 용납에 그치지 않고 도리어 내 행동을 이해한다는 호의가 다가올 때, 우리는 그 사랑 앞에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잘못했으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매우 놀랄 일임이 틀림없다.


용서는 이렇듯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이런 사람들도 있다. 약속 시간에 5분여 정도 늦었다고 처음 보는 그 사람을 시간 개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 출신 고등학교를 보고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일 거라 지레짐작하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들이 싫다. 기독교적 표현으로 한다면 정죄일 것이다. 다만 정죄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도 정죄에 포함된다면, 그래서 그런 정죄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고 다른 크리스천이 내게 말한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다만 이런 상황 가운데 내 안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은 어쩔 수 없다.


분명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다 느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 확실한 사실은 나는 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 내 안에도 분명히 있다. 정도의 차이는 사람마다 있겠지만, 그것조차도 서로 다른 영역이라 생각한다면 기다림이 필요하지 않을까.

판단과 정죄가 아니라 용납과 오래 참음으로 용서를 실천해 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륜구 (기공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