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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라는 단어의 질감은 참 이질적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블루칼라가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 역시 그렇다.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투쟁하는 사람, 구호와 투쟁가를 트는, 혹자는 을질과 뗏법으로만 자신의 권리를 챙기려 하는 이기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화이트칼라 직종들, 고학력자들이 진입하는 사무직, 전문직 종사자 역시 노동자다. 이 글을 읽는 학우 대부분은 이미 노동자이거나, 곧 노동자가 될 것이다. 그뿐인가,  내가 발을 딛고 선 이 세상은 타인의 노동으로 구성된다. 오늘 먹은 깻잎 한 장도, 깨끗한 학교 화장실도, 세련된 상자에 담겨있는 아이폰도 누군가의 손끝에서 나온 땀방울과 노동으로 이뤄진 것이다. 상품과 자본, 경영자의 미담에 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치지만, 그 이면에 착취당하는 노동자에 대한 담론은 유통되기 어렵다. 명문대의 으리으리한 건물을 쓸고 닦는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은 얼마나 고된지, 그들이 받는 임금은 얼마나 적은지는 환기되지 않는다. 우리가 저임금, 불안정노동에 종사하는 그들의 노무를 너무 쉽게 평가한 탓이다.


이 사회를 구성하는 타인의 삶에 관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나 또한 노동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다층적으로 구성된 이 사회 구조에서 내가 한 공모가 전무하지 않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은 완전히 분리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깻잎을 아무렇지 않게 먹으면서, 그 깻잎을 딴 임금체불자 이주노동자 31,998명의 삶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노동자들의 삶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주변에 있는 사회운동단체를 찾아볼 수 있고, 교내 인권 소모임 등에 동참하며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필자가 확인하고 있는 조직 서강대학교 인권 실천 모임 ‘노고지리’ 역시 관련 사안에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는 단체 중 하나다. 노동 관련 뉴스나 도서를 찾아 읽고, 연서명에 동참할 수도 있다. 무엇이 됐든, 저마다의 위치에서 본인의, 그리고 동료 시민의 노동자 됨을 기억하고 표현할 수 있길 바란다.


김희주 (영문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