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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김 영 덕, 본교 철학과 교수 김 한 라

여기, 2대째 서강대학교에 연이어 재직해 온 교수 부자가 있다.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김영덕 교수와 철학과 김한라 교수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봤다.

김현주 기자 hj210031@sogang.ac.kr

 



| 서강에서 보낸 빛나는 젊음


“15살까지는 일본 식민 교육을 받았지. 해방 후에 처음 한글도 배우고 그랬어.”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까지. 김영덕 명예교수가 직접 들려주는 유년기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그대로 맞물려 있었다. 해방 이후의 한국은 일본이 물러가고 미군이 들어오며 온통 ‘미국 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였다. 김 명예교수도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외국인 친구와도 교분을 나눴다. 그런 노력들이 빛을 발한 것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였다. 그는 수학이 좋다는 이유로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부푼 꿈을 안고 신입생이 된 것도 잠시, 대학교 2학년 때 6·25 전쟁이 났다. 시골로 피난을 갔었다가, 서울이 수복되어 돌아와 보니 ‘도통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김 명예교수는 대학 시절을 그렇게 회상했다.


“그래서 그냥 통역장교로 일단 군대를 갔지.” 그간의 영어 공부가 빛을 본 시점이었다.  당시 한국군 편제에는 포병이 아예 없었다. 포병을 훈련시키기 위해 미국으로 군인들을 보낼 때 통역병이 필요하다기에 일단 지원했던 것이 미국과의 인연이 됐다. 그때의 인연을 발판 삼아 미국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입자물리를 연구하는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몇 명 없던 시절이었다. “유카와 히데키라는 일본 물리학자가 노벨상을 받아서 엄청 유명했어. 그 사람 같은 연구를 하고 싶어서 입자물리학을 골랐지.”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해오던 그는 서강대가 갓 생겼을 무렵 소식을 듣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강대학교라는 이름조차 없었어. 그런데 장래가 유망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지. 그렇게 돌아와서 우리 한라를 낳고, 키우다 보니 시키지도 않은 철학을 하고….” 김 명예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옆에서 김한라 교수가 설명을 보탰다. “어릴 적에 인생 문제를 고민하다가, 철학이 혹시 그걸 해결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공부하게 된 거예요.”


두 사람이 돌이키는 옛 시절은 유독 각별했다. 김 명예교수는 아들이 어렸을 적, 지게 하나 달랑 메고 자연을 보러 여행을 다녔던 일들을 회상했다. 매년 여름이면 부자는 서강대 구성원을 위한 여행지였던 하조대 별장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직 사람이 적어 물이 깨끗하고 수영하기 좋던 시절이었다. “산과 자연과 들···그런 걸 좋아하는 이유도 그때 다 배운 거죠.” 김 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서강대 교수로 재직한 아버지 덕에 김 교수는 유년기를 서강대 캠퍼스 근교에서 보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전부 이 근방에서 다녔다. 옛 캠퍼스는 어린 김 교수의 놀이터였다. “여기서 나고 자랐어요. 옛날엔 본관이랑 부속 건물만 있었지요. 다른 건물들 자리에는 큰 언덕만 있었는데, 겨울이면 썰매를 가져와서 눈썰매를 타던 기억이 나네요.” 학사 과정 역시 서강대 철학과를 수료했다. 



| 학문을 향한 바래지 않는 열정으로 


김 교수는 졸업 이후 논리학을 더 깊게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처음 유학을 갔다. 유학 시절 만난 독일철학 교수님과의 인연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다. “아직도 우리 집사람이 날 보고 왜 철학을 시켰냐고 그래.” 김 명예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때마다 뭐라고 대답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가만히 있지, 그냥. 내가 시켰나, 자기가 하고 싶어서 했지···그걸 누가 막겠어.”


김 교수는 칸트가 다루는 ‘인간’에 그 무엇보다 매력을 느꼈다고 전했다. 체계적이고 정교한 철학 아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논의를 잊지 않은 점이 좋았다고. “세계시민이 되기 위한 비전을 보여주는 철학이라는 점이 좋죠.” 그렇게 미국에서 칸트를 연구해 공부를 하고 교수가 됐다. 여전히 칸트 철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그는, 기자에게 빽빽한 저술 및 연구 계획을 설명했다. 그는 최근 칸트 철학과 함께 한국 전통 철학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 중이다.  “불모지였던 한국학이 점점 부상하고 있어요. 저도 해외 출판사들이랑 계약을 맺어서 한국 철학에 대한 저술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미국 철학 학회 안에 있는 한국철학 분과회도 생겼고요.” 그는 현재 한국철학 분과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그가 서강대의 초청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이미 미국에 정착해, 그곳에서 20년간 학생들을 가르친 후의 일이었다. 여전히 김 교수는 미국에 집을 두고 있으며, 가족들도 그곳에 살고 있다. “방학 때만 (미국에) 갔다가 학기 중에는 (한국으로) 돌아오지요.”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김 교수는 그렇게 답했다. “그래도 서강대에서 가르치는 일이 좋습니다.” 김 교수가 미국에 있을 적 머무르던 학교는 석박사 학위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 학부 중심 대학이었다고 했다. “여기 있는게 그래서 더 보람 있지.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이니까.” 김 명예교수가 옆에서 그렇게 말을 보탰다. “학부만 가르치면 학생들이 금방 떠나버리거든.” 아버지의 말에 김 교수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원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요. 논문도 발표하고요. 저랑 같이 외국에 나가서 발표하기도 하고요.” 


김 명예교수는 최근 ‘이두로 보는 고대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해왔다. 물리학 연구는 이제 계속하지 않으시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제는 아예 손 뗐어, 역사가 너무 재밌어.”라며 손사래를 쳤다. 고대어와 이두를 추적해 가며 문헌을 연구하다 보면 지금껏 주목받지 않은 역사를 추적할 수 있다. 그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이두와 밝혀지지 않은 역사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는 아직도 매일같이 서강대 명예교수실로 출퇴근하며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결코 빛바래지 않는 두 부자의 학문을 향한 열정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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