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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번역가 한 경 연

"작품 원문의 감동을 번역하고 싶어요." OTT와 영상물의 시대, 무수히 쏟아지는 콘텐츠 속에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가 있다. 바로 '자막'이다. 시청자들의 작품 감상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숨은 조력자, '영상번역가'. 한경연 영상번역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나윤 기자 sugar03@sogang.ac.kr

 


│호기심이 터준 영상 번역의 길

‘영상번역가 구합니다.’ 대학생 시절 학과 구인 광고판에 올라온 영상 번역 회사의 모집글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화여자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에게 영상 번역이라는 길은 새로운 호기심으로 다가왔고, 그렇게 그는 영상 번역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초반에는 주로 BBC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번역했지만, 점차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을 번역하게 됐다. “졸업 후 정규직으로 입사해서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했어요. 일을 하며, 저도 모르게 영상 번역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죠.”  

“<웨스트 윙>*을 번역할 때는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었어요.” 문학도였던 그에게 정치, 공학, 건설 분야 등을 다룬 영상물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처음 보는 분야의 영상물을 번역할 때면, 급하게 배경지식을 쌓기 위해 밤을 새운 적도 빈번했다. 어려운 부분은 대충 번역할 수도 있었지만, 생소한 대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공부했다. 번역은 남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신념 때문이었다.

“배경지식이 없다면 좋은 번역을 하기 어려워요.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는지, 누구의 주관이 들어가는지에 따라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죠.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물의 일부가 되어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창조에 가까워요.”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작품들을 공부한 결과, 다양한 지식이 그에게 선물처럼 쌓였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키워낸 언어 순발력

“예전에는 영어 작품을 번역해서 한글 자막을 넣는 일을 주로 했는데, 요즘은 한국 작품에 한글 자막을 삽입하는 일도 많이 해요. 제가 작성한 한글 자막 원본을 보고 다른 나라의 번역가들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거죠.”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시장에 발맞춰 넓어진 번역 시장은 그에게 보다 다양한 것을 요구했다. 회사에서 일한 지 십 년이 넘어가던 즈음 그는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이후 그는 넷플릭스와 같은 OTT 플랫폼에서 한글 자막을 인코딩하고 타임코드를 수정하는 등 보다 새로운 작업에 익숙해지고자 노력했다.

그는 과거에 번역이 끝나고 동료 번역가들과 비디오테이프를 일일이 잘라내던 순간을 회상했다. “요즘은 클라우드에 기반한 번역 툴이 제공돼서 작업하기가 훨씬 수월해요. 옛날에는 영상이 유출될까 테이프를 손수 잘라내곤 했는데, 이제는 클릭 한 번에 휴지통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니 편리하죠.”

작업은 수월해졌지만, 작업물의 내용 유출에 관한 조약은 여전히 엄격했다. 넷플릭스 작품 <더 글로리>를 작업할 때는 주변에서 결말을 물어보는 지인들에게 내용을 숨기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일본어 단어 하나를 몰라서 지인에게 물어봐도 되는지 넷플릭스 측에 문의한 적이 있었는데, 절대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입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죠. 누가 물어보면, 그냥 ‘다 죽는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요. (웃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만의 번역 노하우도 생기며 순발력 있게 작업하는 방법들을 터득했다. 어느덧 이 분야 나름의 ‘베테랑’이 됐다.  

 

│좋은 ‘말'을 가장 먼저 만난다는 소중함

“문장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시처럼 다가왔어요.” 컴퓨터 화면이라는 작은 공간 속에서 그는 무수히 많은 내레이터와 만나고 소통했다. 특히 데이비드 아텐버러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번역할 때면 거장의 작품을 맡았다는 뿌듯함에 마음이 벅차기도 했다. “그분의 다큐멘터리는 시예요. 단순하지만 울림이 있고, 정렬된 대본이라는 게 느껴져요.” 그렇게 자연 다큐멘터리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로 자리 잡았다.  

갑작스럽게 닥친 코로나 상황 속에서 그의 작업물들은 도리어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 “인기가 없는 작품이더라도 그 안에 울림을 주는 글귀들이 하나씩은 있어요.” 울림이 있는 글귀들과 그 말을 만든 작가와 감독, 온 힘을 들여 작품을 완성했을 이들의 모든 노고를 지켜내기 위해 그 역시 글자 하나하나에 시간을 담았다.

“아무리 AI가 발달해도 사람의 머리와 손끝에서 나오는 글들을 이길 순 없어요.” 그는 자신의 일을 오랫동안 하고 싶다고 말한다. 시대가 흘러가고 환경이 변해도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좋은 글귀들을 만들어 가고 싶다고, 그렇게 작품을 본 누군가에게 감동과 여운을 선사하고 싶다고 말이다. 매 순간 진심과 애정을 담기에, 그가 번역한 문장들은 하나의 ‘시’가 되어 누군가의 마음으로 다가간다.

 

*웨스트 윙 : 미국 대통령과 보좌관들의 일을 그려낸 미국의 정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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