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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평화 교양 교수 김 준 혁


모두가 존중받는 세상을 꿈꿨던 조선의 마지막 개혁 군주, 정조대왕.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수원화성 역사 전문가 김준혁 교수의 여정을 들여다봤다.

글·사진 | 부지희 기자 orcaboo@sogang.ac.kr



│외로웠던 소년, 교수의 길을 걷다

“누구도 저와 놀지 않고 근처에도 오지 않았어요.” ‘왕따’라는 개념조차 없던 그 시절, 김 교수는 상처로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날들을 회상하며 말했다. 그의 고향은 수원이었으나 아버지의 전근으로 북쪽 끝 섬 백령도에 잠시 머물러야 했다. 의지할 유일한 벗이 책뿐이었던 그는 1년간 도서관의 책을 전부 완독했다. 이때 자신도 모르게 쌓여 몸에 밴 지식이 훗날 큰 도움이 됐다. “공부나 강의를 할 때 어려서 읽었던 기억들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왕따를 기회로 만드는 특별한 경험을 했죠.”

이어 그는 역사 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학과에 진학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환경과 언론 분야의 시민운동에 몰두했다. ‘지금처럼 신념과 용기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시민운동을 위해 당신이 전문가가 되었으면 한다’는 아내의 권유에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교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교육 철학은 확고하다. “학생들에게 지식을 올바르게 전달하려면 교수도 올바른 인물이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이 교수에 대한 존경심을 갖지 못해 배우려 하지 않거든요.”


교양 방송 ‘차이나는 클라스’에도 초대될 만큼 인기 있는 강의의 비결에 대해서는 ‘맞춤형 강의’를 언급했다. “제 강의는 똑같았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듣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매번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또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진심을 다해 강의하려 노력해요.”

│하늘이 맺어 준 정조 대왕과의 인연


김 교수는 석사과정 당시 학점교류를 위해 서울대 대학원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접한 첫 자료가 조선 시대 정조 때 전국 불교 사찰이 기록된 『범우고』였다. 당시 조선의 지배 사상은 유교였기 때문에 불교는 배척과 멸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반면 정조는 『범우고』를 편찬하여 천대당하던 승려들까지 자기 백성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정조는 산중에서 굶어 죽고 호랑이에게 물려 죽기도 하는 승려를 국왕인 자신이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어요. 하찮게 여기거나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까지 백성을 생각한 정조라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김 교수는 그때가 바로 정조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고 회고한다.


알고 보니 그가 나고 자란 수원 땅은 정조의 역사와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소였다. “‘하늘도 내가 정조를 연구하게 돕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는 화성행궁 복원에도 크게 기여했다. 김 교수가 수원시 학예 연구사로 임명받은 2003년 당시 화성은 아직 랜드마크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화성 안은 물론이고 행궁 주변 상권까지 텅 비어있었죠. 화성행궁 복원 사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역사와 문화 기반의 도시재생을 추진했어요.” 그는 정조의 사상을 수원의 정신으로 재현하고 화성을 세계화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했다. 자료를 토대로 ‘무예 24기’와 같은 공연을 직접 만들고, 사도세자의 묘로 향하던 정조의 모습을 재현하는 ‘정조대왕능행차’도 체계화했다. 


이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다. “2004년에 화성성역의궤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제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어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의궤의 가치를 모르니까요. 그것을 이해하게끔 설득하는 게 진정한 지도자 내지는 일꾼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그는 문화재청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를 설득해 3년 만에 의궤를 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킬 수 있었다. 


│존중과 배려 그리고 천명을 향해

김 교수는 정조 대왕으로부터 배운 가장 큰 가치로 존중과 배려를 꼽았다. “정조는 다른 권위적인 국왕과는 좀 달랐어요. 명령보다 소통을 중시했죠. 서로 마음을 열 수 있는 진정한 소통을 위해 항상 타인을 존중했어요.” 그는 정약용의 글에 기록된 정조의 ‘아재 개그’ 이야기를 예시로 들려줬다. “정조의 아재 개그는 분위기를 풀고 신하의 체면을 살려 주는 방법이었어요. 이렇게 위트와 여유를 이용한 부드러운 배려가 지도자에겐 중요하거든요.”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존중을 잃고 있어요. 강자가 약자를 우습게 알고 그들을 예우하지 않는 시대가 왔어요.” 그는 사회가 갈등과 차별이 심해지며 점차 붕괴하는 사태를 우려했다. “많은 사람이 정조 대왕의 따뜻한 품성과 행동을 배워 오늘날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정조 사상과 수원 문화의 세계화다. “정조 때의 실학과 동학을 위대한 사상 중 하나로 알리고 싶어요. 또 수원이라는 도시를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만들어 내고 싶죠.” 김 교수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수원 화성 문화의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가 실현되면 수원은 지구에서 유일하게 세계, 기록, 무형 유산을 모두 가진 도시가 된다. “이것이 하늘이 저를 이 땅에 내려가게 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꿈을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가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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