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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참다못한 공무원들이 거리로 나왔다. 지난 29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공무원노조)과 대한민국공무원노조총연맹(공노총)이 서울 시청역 앞에서 ‘악성 민원 희생자 추모 공무원노동자대회’를 열었다. 악성 민원으로 한 달 새 공무원 다섯이 연달아 사망한 사건이 집회의 불을 지폈다. 이날 이들은 ‘악성 민원은 범죄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악성 민원 근절 대책 마련 및 관련 법 개정을 촉구했다.


▲ 지난 29일 오후 2시경 서울 시청역 앞에서 추모 대회 참여자들이 “악성 민원은 범죄다” 구호를 외치고 있다.


│악성 민원으로 청년 공무원 다섯 사망

│“남일 아냐 ··· 죽거나, 휴직하거나”


지난 3월 5일 김포시 공무원 A 씨가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도로 보수 공사로 차량 정체가 발생하자 한 악성 민원인이 온라인 카페에 공사 담당자였던 A 씨의 실명과 부서, 번호 등 신상을 공개했다. 이른바 ‘좌표찍기’의 표적이 된 것이다. 온라인과 민원 전화로 조리돌림을 당하던 그는 결국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도 공무원 4명이 악성 민원으로 연달아 사망했다. 모두 입직한 지 3년이 채 안 된 청년 공무원이었다.


지난 29일 사망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검은색 옷을 입고 모인 공무원들. 전국에서 동참한 1,300여 명의 공무원들이 시청역 일대에서 검은 물결을 이뤘다. 선발대가 희생자들의 영정을 품에 안고 연단에 올랐고 선배 공무원들은 먼저 떠난 어린 동료들 앞에 일제히 묵념했다.


▲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이해준 위원장이 희생자를 본뜬 영정을 품에 안고 있다.


연단에 선 공무원 B 씨는 “나도 (A 씨와) 같은 도로과에 근무한다. 여전히 죽이겠다는 민원이 한둘이 아니다. 작년에 집 앞에 배수로가 넘쳤는데 만약 올해도 넘친다면 죽이러 오겠단다. 우리에겐 죽거나, 휴직하거나, 면직하거나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이냐”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그는 “김포시의 우리 동료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공감이 간다. 처음엔 나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공무원이었다”고 씁쓸함을 표했다.


집회에 참여한 공무원 C 씨는 “희생된 동료를 추모하기 위해 오늘 12시까지 근무하다 왔다”며 “악성 민원은 나도 여러 번 겪어봤고 주변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이 남일 같지 않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보고된 악성 민원 사례는 2018년 3만 4,484건, 2019년 3만 8,054건, 2020년 4만 6,000건, 2021년 5만 1,883건에 달한다. 지난해 8월 공무원노조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전체 응답자의 무려 84%(5,933명)가 ‘최근 5년 사이 악성 민원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퇴직하는 청년 공무원들도 증가하고 있다. 최근 5년간 입직 5년 미만 퇴직자는 전국 4만 5,606명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일반 퇴직공무원의 65%에 해당하는 수치다.


연단에 오른 입직 10개월 차 청년 공무원 황보영 씨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시를 준비하며 졸업과 동시에 공무원이 됐다. 악성 민원에 시달리니 불타올랐던 사명감은 근무한 지 두 달 만에 재가 됐다”며 “어느 날은 출근하다가 문뜩 저기 달리는 자동차에 치이면 오늘 민원 안 들어도 되겠지하는 위험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고 밝혔다.


이날 공무원노조는 “악성 민원을 비롯한 공직사회의 부조리로 고통받다 떠나는 이들은 대부분 청년 공무원들”이라며 “조직의 기반이자 미래인 청년 공무원이 절망에 빠져있는 한 공직사회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고 외쳤다.


│정부 악성 민원 전화 차단토록 개선돼

│이제 악성 민원 전화 끊을 수 있어


지난 2일 정부는 ‘악성 민원 방지 및 민원공무원 보호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로 공무원에게 악성 민원을 차단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됐다. 기존엔 전화로 민원인이 욕설을 하거나 민원과 상관없는 내용을 장시간 발언해도 그대로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 대책을 통해 민원인이 폭언을 할 경우 통화를 종료할 수 있도록 하고, 통화 1회 권장 시간을 설정해 부당한 요구 등으로 권장 시간을 초과할 경우 이 역시 통화를 종료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기존 행정기관 홈페이지 등에 공개된 공무원의 개인정보는 온라인 괴롭힘의 원인이 됐었는데, 이를 기관별로 상황에 맞는 공개 수준으로 조정하도록 권고해 개인정보를 가릴 수 있도록 개선됐다.


악성 민원 전담 대응팀도 신설될 예정이다. 악성 민원에 대해 공무원 개인이 아닌 기관 차원의 대응이 이뤄지도록 기관마다 전담 대응팀을 두도록 권장된다. 또한 민원창구에는 경험이 많은 경력자를 우선 배치하도록 해 신규공무원을 보호한다. 이 외에도 민원실 안전요원 배치, 비상벨 설치, 심리상담 제공 등을 통해 공무원을 보호·지원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인력과 예산 관련 논의는 미비해

│법적 제재가 근본 대책


그러나 해당 대책에는 인력과 예산이라는 중요한 알맹이가 빠져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정부의 대책이 발표되자 공무원노조는 이날 성명을 내고 “민원 부서에 안전요원을 배치하려면 정원을 확대하고 인건비를 증액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며 “각 기관의 전담 대응팀 구성은 의무가 아닌 권장 수준이고, 기관장이 공무원 보호조치를 미이행했을 때의 처벌 조항도 없어 강제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악성 민원을 차단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것은 긍정적이나, 인력과 예산에 대한 내용이 논의되지 않았고 강제력이 없어 정작 일선에서 대책이 제대로 작동할지 의구심이 든다는 입장이다.


한편 울산대 행정학과 김재홍 교수는 “악성 민원 전담팀을 만드는 것도 악성 민원을 개인이 담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움이 되겠지만 그 실효성은 의문”이라며 “공무원 보호를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악성 민원 자체를 던질 수 없도록 악성 민원인에게 페널티를 줘 법적인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고 제언했다.


글·사진 | 박주희 기자 juhui1120@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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