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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6년 여름에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현지 조사차 그해 가을 처음으로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했다. 당시 자취를 했던 곳은 바로 하노이 국립대학의 공과대학이 자리 잡고 있던 바익 코아(Bch Khoá) 지역의 어떤 가정집이었다. 이후에도 박사과정 현지 조사나 박사학위 취득 이후의 여러 가지 일로 하노이를 찾았는데, 2011년 6월 말에는 15년 만에 다시 바익 코아 지역에서 잠시 머물렀다. 15년이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겠지만, ‘역사학도’의 눈과 귀로 느낄 수 있던 이곳의 풍경은 그야말로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언젠가 동남아 지역을 전공하는 모(某) 정치학자가 나에게 일정한 컨셉(아마도 ‘현지 조사와 사랑’이란 주제였나?)을 강요하며 ‘동남아로 먹고사는 역사학자’의 현지 1조사 경험에 대한 글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반강제적인 컨셉도 문제였거니와, ‘역사학도’가 통시적으로 체험하는 비교적 복잡한 실존적 경험을 얄팍하게 상업적으로 포장하는 ‘저의’에 부화뇌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이 글을 통해, ‘역사학도’가 현지를 자꾸만 찾아 나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 어느 꾸안 비아 허이(생맥주집)의 ‘변화’와 ‘연속’을 이야기하며 조금이나마 다루어 보고자 한다.

내가 바익 코아 지역에서 즐겨 찾던 일종의 노점상과 같은 생맥주집은 조그만 삼거리의 한구석에 있었다. 오후와 이른 저녁에는 누님 한 분이 이 맥주집을 관리했고, 늦은 저녁과 새벽에는 그 누님의 남편이 영업을 이어받았다. 둘째 딸아이를 데리고 있던 그 누님은 분주히 옮겨 다니며 손님들에게 맥주를 권했고, 사람 좋아 보이는 그 형님이 매장에 설치된 신형 비디오를 좀도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맥주집에서 노숙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토요일이면, 나는 또 다른 베트남 ‘역사학도’와 함께 점심을 먹은 후, 그 집에서 오후에서 밤까지 자리를 옮기지도 않고 작은 의자에 쪼그려 앉은 채로 베트남 역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15년이 지나서 보니, 사라진 줄 알았던 그 맥주집은 보다 쾌적한 건물의 1층에서 계속 영업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공과대학 학생들이 잠시 들려 안주도 없이 혹은 땅콩만으로 맥주 몇 잔을 마신 후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허접한’ 안주로 맥주를 들이켜는 학생들은 없는 것 같았다. 풍성한 야채, 각종 마른안주, 삶은 닭, 볶음밥 등을 풍성하게 시켜놓고 시끄럽게 떠들며 놀다가, 그 많은 안주를 그대로 남겨 놓고 별 부담 없이 계산하고 나갔다. 오히려 그 옆에서 맥주 몇 잔을 기울이며 과거의 궁색한 추억에 얽매여 있던 나의 옹색한 안주가 참으로 안쓰럽게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맥주집에는 내 큰 놈 또래(당시 13살)로 보였던 네 명의 어린 종업원들이 분주히 안주도 만들면서 서빙하고 있었다. 내 얼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던 그 누님은 15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옛날 맥주집에서 데리고 있던 둘째 딸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있었고, 집을 몇 채 가지고 있으니 관심 있으면 월세를 싸게 놓겠다고 했다. 그리고 누님과 형님의 관계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돈 관리는 누님의 몫이었고 형님은 그저 궂은일을 도맡아 하다가 이따금, 혼나는 대상이었을 뿐인데, 이제는 손에 잔뜩 돈뭉치를 움켜쥔 형님이 누님에게 종종 소리도 질러댔다. 저 형님이 그동안 ‘간댕이’가 그렇게 많이 부어버렸나?

하지만 그 누님의 영업 방식은 여전히 과거와 변함이 없었다. 손님이 미쳐 잔을 비우기도 전에 새로운 잔을 건네던 권주(勸酒) 스타일은 15년이 지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테이블을 조망하고 있다가 잔이 거의 비어갈 무렵이면 어김없이 새롭게 가득 찬 맥주잔이 날아왔다. 그 때 누님을 바라보면 씽긋 웃곤 했었는데, 익살스러운 그 미소는 입가의 주름에도 아랑곳없다. 네 명의 어린 종업원을 거느리고 자정까지 장사를 하는 형님은 청소로 분주한 아이들에게 밥 먼저 먹고 해도 괜찮으니 볶음밥을 먼저 먹으라고 퉁명스럽게 재촉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밥 먹으면서 맥주 한 잔씩 해도 괜찮으냐고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니, 그저 묵묵한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 누님에게 대들기도 하는 그 양반의 무뚝뚝한 표정과 따뜻한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았다.

하노이의 어느 생맥주집을 통해 바라본 15년 역사의 ‘변화’와 ‘연속’은 나와 같은 ‘역사학도’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현지 조사는 문헌 분석을 주된 방법론으로 삼는 ‘역사학도’에게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경험을 어지럽히며 새로운 문제를 들추어낸다. 베트남의 개혁과 개방을 상징하는 도이 머이 정책으로 누님과 형님이 도대체 돈을 얼마나 벌었을까? 바익 코아 공대생들의 용돈이 얼마쯤 되길래 저렇게 ‘과소비’를 하고 다니는 것일까? 아마도 지방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수도에 와서 일하기 시작했을 법한 아이들의 생활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도이 머이 정책 채택 이후 당시의 현실 분석에 치중한 다양한 논저들의 탐구와 미래 예측이 과연 얼마나 당시의 상황에 부합하고 있었을까? 현지 조사로부터 얻은 이러한 질문들을 고려해 본다면, 주로 문헌 탐구에 의존한 나의 학문적 가설이 현지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조금씩 검증되고 수정되어 과거와 현재의 ‘변화’와 ‘연속’을 적절하게 규명하면서 새로운 역사적 연기(緣起)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윤대영('아시아지역사특강1' 강의)
  •  승인 2019.06.1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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