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선수 박태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마린보이‘ 박태환이다. 그는 아테네 올림픽의 시련을 딛고 베이징 올림픽에서 2개의 메달을 목에 걸며 대한민국 수영 최초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한국은 수영 스포츠 인프라가 열악했고 동양인에게 남자 자유형 종목은 불모지였기에 이는 수영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그를 만나 학창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혜지 기자 hyejee000720@
┃수영 유망주에서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어렸을 때 기관지가 안 좋았던 그는 의사의 권유로 처음 수영을 접했다. 5살의 어린 나이에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유치원을 졸업할 때 대회에서 1등을 했던 것이 어머니가 전문적으로 수영을 시키기로 다짐하신 계기였다고.
그는 선수 생활을 병행하며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학창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생은 보통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거나 놀다가 집에 가는데 저는 그런 시절이 없었어요. 학교가 끝나면 바로 운동을 하러 가야 했죠.“ 지금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한 추억이 별로 없어 아쉬우면서도 그만큼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대학 입학 직후에도 그는 바로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해 학교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후에는 학생 신분으로 지낼 줄 알았으나 이어 런던 올림픽을 준비해야 했다. “대학을 다니며 OT와 MT에 못 가본 것이 아쉬워요. 수영선수 박태환이 아닌 대학생 박태환으로서 보낸 시간이 거의 없었어요.“
국가대표가 되기 전 지녔던 목표를 묻자 그는 “경기에서 우승했을 때 어머니가 아픈 걸 잊고 극복해 나가시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를 위해 열심히 했다“고 답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로 출전했을 때에는 한국 신기록을 깨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전했다. 한국 신기록을 경신하자 다음으로는 아시안 게임에서 정상을 차지하고 싶었다고. 그 이후에는 세계 1위가 되고 싶었으며 마침내 올림픽에서 목표를 이뤘다며 미소를 지었다.
수영선수 말고 다른 꿈이 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하고 싶은 건 많았다“며 “음악과 미술에 관심있었고 지금도 미술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답했다. 그래도 운동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수영선수가 아니어도 다른 종목의 운동선수를 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시련을 딛고 금메달을 목에 걸다
18살,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에 오르자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그에게 온 국민의 관심이 쏟아졌다. 어린 나이에 스포츠 스타가 돼 받은 수많은 주목이 부담스럽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어렸을 때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마냥 좋고 신기했다“고 답했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한국에 돌아오니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행동을 조심하게 됐고 성격도 내성적으로 바뀌었다고. 원래 활발한 성격에 개구쟁이였으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수영을 배우던 시절 그의 롤 모델은 호주의 이안 소프 선수였다. 이안 소프의 영상을 찾아보며 영법과 테크닉을 따라하려고 노력했다. ‘이안 소프처럼 수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가슴 한편에 갖고 연습을 했고, 실제로 영법이 이안 소프와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그는 수영선수로서 경험했던 특별한 에피소드로 아테네 올림픽에서 실격 당한 일을 꼽았다. “올림픽에 나가 실격 당하는 수영선수가 흔치는 않은데 저는 국가대표로 출전한 첫 경기에서 실격을 했어요.“ 아테네에서 연습을 하며 롤 모델이었던 이안 소프를 몇 번 봤는데, 신기했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고. 대기실에서 이안 소프를 마주쳐 어쩔 줄을 몰라 했던 바로 그 대회에서 실격을 당했다. 수영선수로서는 창피한 일이었지만 롤 모델을 만난 흔치 않은 에피소드는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아테네 올림픽에서 실격하고 한국에 돌아오자 수영이 잠시 싫어지기도 했으나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대표팀에 들어가서 부족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 연습에 매진했다. 그 결과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시련을 딛고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모든 올림픽 중에 베이징 올림픽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제 수영 인생에서 가장 빛날 때였으니까요.“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가 베이징 올림픽이라고 하면서도 아테네에서의 실패가 있어 베이징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테네 올림픽은 슬픈 기억이면서도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발판을 마련해 준, 지금 생각해보면 고마운 대회라고. 그는 성공을 좇는 과정에서 실패를 맛볼 수도 있다며 그때의 기억을 덤덤히 회상했다.
┃대한민국의 수영을 발전시키기 위한 도전
그는 올해 자비를 들여 3∼8세 전용 어린이 수영장인 ‘박태환수영장‘을 개장했다. 수영이 생명과 직결되므로 어린이들이 수영을 접하고 안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고. 또한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국내에 수영 인프라가 잘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고 전했다. “한국은 수영장이 한정적이어서 호주에서 받았던 트레이닝을 그대로 소화할 수가 없었어요. 호주에서는 일반인과 선수의 레인을 구분해 혼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한국에서는 한 레인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요.“ 한국에서 훈련할 때 스케줄 관리가 힘들었기에 선수들이 훈련을 잘 소화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힘든 일이 찾아와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잘 극복했으면 좋겠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자신도 선수 생활을 하면서 힘든 일을 맞닥뜨린 경험이 있어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또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하되 해야 하는 것과 구분해 매사에 열심히 한다면 원하는 목표를 이룰 것이라 말했다. 수영선수들이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계속 도전하고 있는 박태환 선수. 우리나라의 수영 문화와 인프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그의 행보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