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visual


▲ 『사랑의 기술』 저자 에리히 프롬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관찰에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관찰 대상과 관련한 지식이 해박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관찰뿐만 아니라 다른 일을 행할 때, 그와 관련한 지식이 필수라는 의미로 확장돼 쓰이기도 한다. 예컨대 음식 재료의 특성, 주방 기구의 쓰임을 잘 알고 있어야 더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떨까. 사랑 또한 사랑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더 잘 사랑할 수 있을까?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사랑 또한 배워야 하는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음악, 의학처럼 사랑도 연마해야 할 ‘기술’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때 기술(Art)은 단순한 연애 전략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에 필요한 태도, 품성을 모두 포괄한다. 즉 좋은 사랑을 원한다면 좋은 ‘나’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랑에 관한 현대인의 착각


프롬은 서문에서 철학자 파라켈수스의 말을 인용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프롬은 다음과 같은 현대인의 착각이 ‘사랑은 배울 필요가 없다’는 오해의 배경이라고 지적한다. 첫째, 현대인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여긴다. 예를 들어 사회적 명예와 부를 갖추거나 외적 치장에 힘쓰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프롬의 말에 따르면 이는 ‘벗을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갖는 방법’과 같을 뿐이다.


둘째, 현대인들은 사랑을 ‘능력’의 문제가 아닌 ‘대상’의 문제로 가정한다. 이는 자유연애가 가능해지면서 사랑의 대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된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 프롬은 인간관계가 시장의 교환 원리처럼 작동해 사람들이 상품을 고르듯 사랑할 대상을 선택한다고 주장한다. 이어 그는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의 교환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현대인들은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를 혼동한다. 두 남녀가 만나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초기의 단계에서는 서로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최초의 기쁨은 계속될 수 없다. 점차 연인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더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프롬은 이와 같은 현대인들의 착각을 비판하며, 반복되는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랑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숙한 사랑이란


프롬은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로 상대와 합일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합일이란 인간이 분리 상태로부터 오는 불안감을 극복하고자 타인과 결합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는 각자의 특성을 지키는 사랑은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타인에게 복종하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형태의 합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성숙한 사랑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능동성’이 있다. 사랑은 본래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으로, 수동적 감정이 아닌 능동적 활동이다. 이때 ‘준다’라는 말은 희생과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는 것 자체가 기쁨을 의미한다.  


프롬은 사랑의 기본적 요소로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을 꼽는다. 첫 번째 요소인 보호는 사랑하는 이의 생명과 성장에 관심과 노력을 쏟아야 함을 말한다. 이는 모성애와 동식물에 대한 사랑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두 번째 요소인 책임은 사랑하는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다. 책임은 타율적인 의무와는 다른 자발적 행동으로, 사랑하는 이의 문제를 자기 일로 여기는 것이다.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은 상대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의 성장을 지지하는 것을 뜻한다. 존경을 통해 인간은 상대를 구속하거나 지배하는 일을 경계할 수 있다. 더 나은 존경은 마지막 요소인 지식으로 가능하다. 지식은 대상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그 대상을 더 잘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사랑은 노력하는 것


사랑에 대한 프롬의 통찰은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므로 어떤 사랑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에리히 프롬 또한 사랑을 논하는 데에 있어 완벽한 사랑의 형태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프롬이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오직 사랑에 실패했을 때, 단순한 교훈의 형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즉 사랑의 의미와 자신의 태도를 성찰하면서, 지속해서 더 나은 사랑을 실천해가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 사랑은 무의미하다. 이를 고민하지 않는 사랑은 생동하는 행위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정체된 감정일 뿐이다. 프롬의 지적처럼 우리는 더 나은 사랑의 방법을 고민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이듯,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의진 기자 iamchayj@sogang.ac.kr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