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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탤지어, 우리를 과거로 이끄는 진한 향수


④‘영원한 과거’가 가능해진 현시대를 돌아보다



바야흐로 ‘노스탤지어’가 지배하는 시대. 청년들은 디지털카메라에 열광하고 TV에서는 80년대 배경의 드라마가 흥행한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기획 면에서는 ‘노스탤지어’가 우리 사회와 청년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를 전시하는 일민미술관.


노스탤지어는 고전적으로 개인이 겪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미디어의 발달로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를 생생하게 접하게 됐고 심지어 그 시대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 즉 노스탤지어를 느끼기도 한다. 노스탤지어를 유발하는 과거의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특정한 과거는 전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됐으며 노스탤지어를 이용한 산업의 이용층도 다양해졌다. 노스탤지어 산업이 인기를 끌자, 과거의 어떤 것이 소멸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문화비평가 그래프톤 태너는 이 현상을 ‘영원주의(Foreverism)’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는 사회 전반에 도래한 영원주의를 관찰하며 그 속성을 돌아보는 현시대의 작가 12팀을 소개하는 전시다. 전시는 작품을 통해 노스탤지어의 생성과 작용을 설명하고 노스탤지어에서 기인하는 현시대 속 영원주의의 경향을 보여준다.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에 스티브 비숍 작가의 <스탠다드 발라드>가 상영되고 있다.


지난달 24일, 기자는 전시 관람을 위해 일민미술관에 방문했다. 미술관의 1층부터 3층까지 사진, 영상, 게임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1층에 전시된 작품들은 영원주의가 가능해진 조건인 ‘미디어 환경’을 다룬다. 전시실 한쪽 커튼으로 분리된 공간에 들어서면 스티브 비숍 작가의 영상 <스탠다드 발라드>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폐막식 영상의 한 장면에 2000년대 미국 팝 가수 노라 존스의 ‘선라이즈(Sunrise)’ 커버 곡을 삽입했다. 모스크바 올림픽은 공산주의 국가가 올림픽 개최국이 된 최초의 사례로, 이에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불참 선언이 잇따랐다. 우여곡절 끝에 진행됐던 행사인 만큼 영상 속 폐막식을 관람하는 이들의 얼굴엔 기쁨과 아쉬움의 눈물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벅찬 얼굴을 한 사람들 뒤로 흘러나오는 잔잔한 발라드 음악은 서정적인 감각을 더한다. 모스크바 올림픽은 작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며 그의 국적은 캐나다로 해당 올림픽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미디어 덕분에 작가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과거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과거가 미디어를 통해 원형 그 자체로 혹은 변주를 거쳐 영원히 이어질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미디어가 영원주의를 가능케 함을 드러낸다.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에 이유성 작가의 <비타-모어 노트>가 전시되고 있다. [사진 제공일민 미술관]


2층의 작품은 노스탤지어와 기억의 형성 과정을 다룬다. 이유성 작가의 <비타-모어 노트>는 ‘기억’을 주제로 한 대표 작품 중 하나다. 작가는 마치 흔적을 남기듯이, 하나의 나무판에 본인에게 영향을 준 개별적인 이미지들을 과거부터 꾸준히 새겼다. 작품을 보면 나무판 위에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이 불규칙하게 배치돼 있다. 당일 전시 해설을 진행한 일민미술관 관계자는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은 기억이 형성되는 원리와 흡사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기억도 또렷한 그림이라기보단 여러 이미지가 뭉쳐진 하나의 덩어리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연속적인 시간을 그대로 저장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파편들로 재구성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에 홍진훤 작가의 <채널 256> 시리즈가 전시되고 있다.


3층 작품들은 더 나아가 노스탤지어의 실체를 파악하거나 노스탤지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 작가들을 소개한다. 홍진훤 작가는 그의 사진 시리즈 <채널 256>에 노스탤지어의 실체를 확인하는 장면을 담았다. 작가는 과거 화려했던 러시아 혁명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혁명의 중심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에 방문하여 혁명을 기리는 장소인 ‘혁명 광장’에 가거나 광장을 생중계하는 TV 채널 ‘256번’을 시청하며 동상, 기념물 같은 혁명의 잔재를 촬영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채널 256>이라는 이름의 작품이 됐다.


작가가 담은 현장에선 과거의 화려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작품을 살펴보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명가인 레닌의 초상화는 골동품점 구석에 처박혀 있고 혁명 기념 동상엔 새똥이 묻어있다. 작가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나의 못된 사고의 관성은 지금의 풍경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가 오랜 시간 가져온 노스텔지어가 ‘관성’으로 작용하여 자꾸만 그를 과거의 화려함으로 이끌고 현재를 외면하게 하는 것이다. 노스탤지어와 현실의 괴리가 주는 회의감을 표현한 작품은 감상자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노스탤지어의 실체가 어떠할지 생각하게 한다.


전시는 영원주의가 도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설명함과 동시에 노스탤지어에 빠져 과거를 답습하는 이들에게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할 계기가 된다.


글·사진 | 이채연 기자 mu1321@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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